러시아에서 맞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은 매우 추웠지만 예상보다는 확실히 덜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기다리던 아랫층의 드미트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니 웃으며 페테르는 확실히 따듯하니까라고 대답했다. 따듯함과는 거리가 확연한 날씨였지만 그럼에도 시라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성이라는 가치는 이럴 때 확연히 드러났다. 집주인 나탈리야가 얼마 전에 다녀온 고향 베르...
그는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해 생각했다. 코끝에는 바닷물에 반사되어 비친 햇살이, 혀끝에는 묘한 소금기가 내내 감돌던 때였다. 바다마을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미닫이로 된 대문을 열고 나와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빨간 우체통이 보였다. 우체통이 보일 때까지 그는 동네 어른들에게 매화나무집 손자구나 하는 말을 두어 번 쯤 듣곤 했다. 우...
시속 몇 키로미터의 속도로 구름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을 시라부는 꽤 경청했다. 평소같았으면 바로 스쳐 지나갔을 숫자들의 나열이 제법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시라부는 비행기가 해수면에 닿는 순간의 충격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순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구명조끼 같은 건 애초에 필요없는 것 아닌가? 안...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속으로 다섯을 세고 알람을 끄는 일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아아아아섯 정도. 다섯보다는 여섯에 가까운 축에 들겠지만 다섯까지 센 것이니 다섯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전기 포트에 물을 담고 전원을 올렸다. 포트가 소란스럽게 끓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욕실로 들어가 찬물에 세수를 했다. 제대로 된 양치는 식사를 한 후에...
지금이 아닌 순간을 사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항상 나긋한 투로 말하던 물리 교사는 그 말투가 딱 어울리는 오후 두 시의 수업 때 그렇게 말했었다. 칠판을 가득 채운 역학이니 공식이니 하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여서 콜린스는 그 때 말에도 온도와 색채가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교사는 그렇게 말하곤 아주 잠깐이지만, 수업을 하는 이에겐 길게 느...
*자살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읽기 전 숙지해주세요. 시라부 켄지로 기억나?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은 먼지가 가득 덮힌 이름을 그렇게 끄집어냈다. 순간 I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고민했다. 시라부 켄지로. 그에 대한 기억은 막 수조에서 혹은 바다에서 건져낸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유영하다가도 뭍으로 끄집어내는 순간의 반응을 닮았다. ...
하나하키병 소재 有 안녕히 가세요. 나의 인사에 그는 그 여전한 얼굴로 웃고 센다이 행 신칸센을 탔다. 창문에 대고 손을 흔드는 것에 함께 손을 흔들었다. 몸 어딘가, 그 기저에서부터 북받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저 조금 슬프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기차가 움직이고 그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기차를 따라 플랫폼의 끝까지 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결국 ...
유난히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었고 오늘이 꼭 그런 날이었다. 몇 번이고 뒤척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끝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동그란 느낌이라곤 없는 딱딱하고 인정사정없는, 그 뜻에 잘 부합하는 단어에 대해. 그리고 나는 아주 홀연하게, 열어두지도 않은 창문 새로 들어온 바람이 나를 휘감기라도 한 것처럼 슬퍼졌다. 언제부터였던가 하는 질문은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발레리, 해변의 묘지 中 인도는 처음이세요? 숙소 앞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은지 한시간 쯤 되었던 때였다.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일본어가 귓가에 닿아온 것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앉아도 될까요? 맞은편의 자리로 다가오며 묻는 말에 스가와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될 것 없다는 표시였...
한 줌이 채 안될 것 같은 꽃다발을 카운터 위로 던지듯 내려놓으며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마음이 계속 모질지는 못해서 스가와라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꽃을 만지작대곤 사이에 꽂힌 카드를 빼들어 내려놓았다. 눈물을 흘리는 모양의 이모티콘이 그렇게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오히려 즐기는 거면 몰라도. 깊게 내쉬어진 숨에 ...
일단 스가와라는 꽃을 가게 안으로 들여오긴 했다. 척봐도 50 송이는 거뜬히 넘을 것 같은 꽃다발의 거대함에 오픈 전부터 땀을 좀 빼긴 했지만. 잘못 놓고 간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희망은 카드 맨 아래의, 꽃에 가려진 -菅原-라는 글자에 산산히 부서진지 오래였다. 작은 가게라서인지 꽃을 들여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향이 가득했다. 퍽 로맨틱한 아침이라...
경쟁사회의 충실한 일원이었던 스가와라 코우시가 반복되는 회색 일상에 환멸을 느끼고 회사를 그만둔지는 올해로 5년이 되었다. 도쿄와 사이타마 사이, 그러니까 행정구역상 확실한 도쿄지만 분위기는 사이타마의 그것인 중간지역에 카페 스가스가시가 개업한 것 또한 5년이 되었다. 퍽 열심히 했던 공부 덕에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대학을 졸업해 또 누구나 이름을 ...
tw @zabella_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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